제목 |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저자 | 수바드라 다스 |
출판사 | 북하우스 |
발행일 | 2024. 06. 07. |
페이지 수 | 408쪽 |
사이즈 | 141✕210 |
도서 형태 | 무선 |
ISBN | 979-11-6405-254-7 03900 |
분야 | 역사 | 세계사 |
정가 | 2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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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심어놓은
권력의 프레임을 뿌리 뽑는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아는 것이 힘이다’, ‘시간은 돈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러한 말들은 믿어 의심치 않은 지혜로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다. ‘과학의 합리성’, ‘교육의 힘’, ‘시간의 중요성’, ‘글의 영향력’ 등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신념들은 현대 문명의 성취이자,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로 공유된다. 하지만 이를 순수하게 옳은 것으로만 생각해도 될까? 오히려 너무 당연하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 안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현대 문명의 성취이자,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으로 공유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이면을 살펴보며, 이 강력한 말들 속에 어떤 ‘권력’의 프레임이 숨겨져 있는지, 역사와 우리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다.
과학, 교육, 민주주의부터 시간, 예술, 죽음까지
열 가지 프레임을 격파하며 세계를 보는 나만의 관점을 되찾는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이성의 최고봉이고, 교육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교양의 중심이며, 시간은 효율적으로 활용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 글은 모든 생각과 사건을 표현할 수 있는 마법의 도구… 이것이 우리의 보편적 생각으로 이를 갖추는 것을 문명화의 기본으로 간주한다. 자연스럽게 이를 갖추지 못한 사회, 사람은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간주한다. 근본적인 질문은 여기서 나온다. 우리 머릿속에 깊이 박힌 ‘과학’, ‘교육’, ‘글’, ‘시간’ 등의 개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가 세운 문명화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누가 확립했으며, 결정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가?
근사하고 당연해 보이는 가치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모양을 갖추고 발전하며,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의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들이 짜놓은 권력 게임의 중심엔 ‘문명과 야만’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생성 과정을 탐구하며, 서구 권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프레임을 활용해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펼쳤는지 파헤친다.
과학을 독차지한 자들은 누구인가? ‘고전’은 누가 결정하며, 어떻게 제국주의의 비전이 되었나? 피라미드는 외계인이 지었다는 말에 숨겨진 뜻은? 시간은 왜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조여오는가? 잉카제국의 문자 ‘키푸’가 역사에서 삭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역사에,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밝혀낸다.
지금 우리에겐 다른 세상을 꿈꿀 힘이 있는가?
프레임을 바꾸지 않으면 어떤 역사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시대로부터 현대사를 시작하여, 해방 이후엔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으로 갈라진 채,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서구 문물을 바탕으로 사회 체계가 형성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선진 문명이란 명목으로 수용된 서구 세계의 사상과 가치관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아쉽지만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세계의 프레임마저 그대로 내면화하여 우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지며, 이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되찾자고 제안한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건 즐겁기보다는 고난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수용해온 신념들을 바닥부터 뒤집어엎고 부정해야 하는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권력의 프레임을 벗어나, 역사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지금, 역사를 읽는 진정한 이유와 새로운 희열이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 책 속으로
서양 문명이 의미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과 연관 짓는 관행과 가치들(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면, 민주주의, 정의, 과학의 합리성 등이다)은 점점 커져가는 유럽 제국의 야망과 권력에 발맞춰 나타났다. 어디가, 또 무엇이 문명화되었는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식민지 통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프레임 속에서 문명을 규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더 강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나머지 지역보다 더욱 발전한 곳들이라 주장한다. (…) 서양 문명이란 여러모로 보건대(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적어도 열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현실을 누르고 브랜딩이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에 가깝다. ‘서양’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서양 문명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화라는 사명’은 식민지를 건설한 국가들의 비전이자 변명이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단순히 자기들 것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문명이라는 틀을 이용해 완전히 재구성했다. (…) 나는 단순히 이런 관념 뒤에 자리 잡은 거짓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기보다는 애초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관념들이 사실이라고 제풀에 속아 넘어갔는가를 이해해보려 한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말들이 사실은 어떤 의미이고, 또 그런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주장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들어가는 말’ 14~17쪽
프레이저의 저서는 문화적 발전, 진보, 문명에 관한 기존의 사상을 확고하게 굳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사상의 초기 버전은 인종이라는 과학적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분류학과 지구상의 생명체를 구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외양의 관찰은 지능이나 행동과 같은 보다 추상적인 자질들과 계속해서 밀접하게 연관이 되었다. 19세기 가장 중요한 영국의 민속학자였던 제임스 카울스 프리처드는 유럽인의 하얀 피부, 그리고 더 훌륭한 지능은 그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아직 겪지 못한 문명화 과정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믿었다. 앙리 드 생-시몽은 문명이 변화할 수 있는가에 관해 이보다 덜 긍정적인 견해를 품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유럽 백인과 같이 높은 지능에 이를 수는 없다고 말하며 프랑스가 노예 제도를 다시금 제도화한 행동을 정당화했다. 인류학자 프레더릭 파라도 여기에 동조했다. 파라는 1866년, ‘인종의 적(Aptitude of Races)’이라는 강의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었다. 야만인 집단, 반쯤 문명화된 집단, 문명화된 집단이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만회할 수도 없고”, 손을 쓸 도리가 없이, 마치 “살아 있는 화석”처럼 시간 속에 얼어붙은 채로 있다고 설명했다. (…)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이 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 인류는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토론 질문을 계속 던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청하는 문명적인 사람들은 설 자리가 생겼다. (…) 과학, 인종, 문명이 강력하게 결합한 결과, 비서구인들은 단순히 이해하기 힘든,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읽혔을’ 뿐인지도 모르는 때조차도, 과학적으로 봤을 때 뼛속부터 글러먹었다는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인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 그 자체의 방법을 통해서만 말이다. 비서구 지역 출신인 사람들, 특히 인종적으로 백인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인간이라고 얘기한다면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리 없다. 그 사람들을 믿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종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 연장선상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일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인종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끔 만들 것이며, 과학이 이들의 알리바이다. 과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게 해준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라는 말은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더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면 과학의 기반, 특히 인종 과학의 기반이 더욱 깊은 목적에 복무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백인이라는 것, 그리고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강력해진다는 뜻이 된다.
1장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45~48쪽
영국에서 ‘고전’이 부유한 젊은이들이 고대 작가들을 연구한다는 의미로 자리를 잡은 것은 1684년 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칭 “해턴 가든에서 교육을 받은 몇몇 젊은이들”이라는 집단이 로마의 건국 역사를 쓴 4세기의 공직자 에우트로피오의 작품을 자체적으로 번역해서 출판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1666년 런던 대화재의 잿더미 속에서 런던이 마치 제국의 정신을 품은 불사조처럼 부상하고 있던 때였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의 표현처럼, ‘아는 것이 곧 힘’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해턴 가든의 선생님이었던 루이스 메이드웰은 이 책의 서문에서 영국인들이 교육에 조금 더 진지해진다면, “영국의 잠자고 있는 재능이 스스로 눈을 뜰 것”이라고 썼다. 교육은 단순히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교육은 대영제국의 지평을 넓히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 데에도 핵심 역할을 할 도구였다. (…)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무렵, 몇몇 문서가 연달아 유출되며 영국 교육 시스템에 포함되어 있는 저열한 모방품을 폭로했다. 이 가운데 하나는 ‘헤링게이 종합 중등 학교’(1969년)라는 보고서로, 저자의 이름을 따서 일반적으로는 덜튼 보고서라고 부른다. 이 보고서는 북부 런던의 흑인 지역 공동체에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서인도 제도 출신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는 교육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백인 영국 학생들보다 IQ가 훨씬 낮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속 보고서인 ‘통합 교육 관련 교육 위원회 보고서’는 헤링게이 의회가 학생들의 학습 능력에 따라 자치구 내의 학교들을 구분할 것을 권고했다. (…)
이 시점은 프랜시스 골턴이 세상을 뜬 지 48년 뒤이긴 하지만, 이런 조치를 그가 찬성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우생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국가라는 골턴의 비전에서는 지능을 수치화하는 것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자손을 낳는 것은 지원하고 장려해야 하는 반면, 지능이 제일 떨어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찰스 스피어만이나 시릴 버트 같은 심리학자들은 지능을 표준화한다는 생각을 품고, 표준화된 지능 시험을 설계하고 개발하면서 골턴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었다. 현재 우리가 지능의 유전학이라고 생각하는, 지능이 유전되는 것인가에 관한 버트의 연구는 11+ 시험을 도입시켜 영국의 정규 교육 시스템의 근본을 형성했다. 11+는 인생을 결정짓는 시험이었다. 높은 점수를 받아 지능이 높다고 여겨지면, 명문 그래머 스쿨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문법(grammar)이란 당연히 라틴어였으며, 그래머 스쿨에서 교육을 받는 일은 그 뒤로도 학업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 상당히 호언장담할 수 있는 길이었다.
2장 ‘아는 것이 힘이다’ 67~81쪽
‘잉카 패러독스’는 잉카가 그 어떤 것들을 기록하는 체계 없이도 건축, 공학 기술, 관료제와 같이 복잡한 필수 조건들을 모두 거느리고 문명을 건설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인류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이상한 소리처럼 들린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잉카에는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알고 있는 문자, 그러니까 종이에 쓰인 흔적은 없었지만, 매듭을 지은 실을 사용하는 ‘키푸(khipu)’라는 고유한 기록 시스템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누군가 굳이 키푸에 관해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키푸는 일반적으로 수를 세거나 계산할 때 쓰는 기초적인 시스템이라 여겨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설형문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최근 10년 동안 이뤄진 연구들은 잉카의 키푸가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여느 문자만큼이나 복합적인 기록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스페인 정복자들도 키푸에 관해 알고 있었다. 잉카 출신 어머니와 스페인 정복자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초기의 ‘제3문화 아이’였던 잉카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잉카인들이 “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매듭으로 기록했다. 심지어는 전투와 싸움, 잉카를 방문한 모든 대사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모든 연설과 언쟁까지도 말이다”라고 1609년에 적었다. 키푸 묶음을 읽는 사람은 키푸카마유크(khipukamayuq), 또는 ‘매듭 지킴이’들이었다. 이들은 무척 정확하고도 접근하기 좋게끔 기록을 보관해두고 있어서, 정복에 나선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을 확실히 위협적인 존재라 여겼다. 그보다 25년쯤 전인 1583년,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에 있는 키푸는 우상숭배적인 물건이므로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스페인의 설명과 상반된 기록들을 손쉽게 없애는 방법이었다. 1562년 스페인의 정복자 디에고 데 란다가 책 27권을 비롯해 마야의 주술적인 물건들 수백 개를 태우라고 명령했을 때와 똑같은 수법이었다. 잉카제국을 격파한 것은 스페인의 총과 철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이야기들도 가세했다. 잉카는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남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생각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스페인이 모두 제거했을 뿐이다. (…)
설령 고고학이나 인류학에는 한 번도 관심을 품어본 적이 없더라도, 이집트에 있는 대피라미드를 지은 것이 외계인이라는 얘기는 아마 들어봤을 것이다. 외계인이라느니, 아틀란티스라느니, 지구의 속이 텅 비어 있다느니 같은 얘기들을 대개는 피해망상증의 경계에 서 있는,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지껄이는 소리라며 일축하기가 쉽다. 그렇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잘못된 정보일 수는 있지만, 정보가 차고 넘치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 이런 생각들은 어느 정도는 실제 고고학과 인류학 이론의 논리적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J. G. 프레이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휴 블레어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문명화되지 않은 백인이 아닌 비서구인들은 이들이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도시나 기념물을 지을 만한 지적 능력이나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유럽 학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에 있는 14세기 요새 도시이며, 한때 약 18,0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시바 여왕의 궁전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렇게 복잡한 건축물과 공학 기술을 다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탐험가 카를 마호는 1871년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방문했을 때 이 유적지는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니라 1,500년이나 앞서 살았으며 8,00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던 성서 시대 사람들이 지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곳에는 한때 문명화된 국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문명은 아프리카 지역의 문명일 리 없었다. 이와 같은 시각은 인종차별주의를 함축하고 있으며, 과거의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을 결코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튀르키예에 있는 에페수스 신전이나,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나,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을 외계인이 지었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인종차별주의라는 동전 한 개의 반대편을 보면, 이와 같은 초기 문명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 분명히 ‘어딘가에는’ 백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사라진 고대의 백인을 찾아 일생을 바친 연구자들이 있다.
3장 ‘펜은 칼보다 강하다’ 111~117쪽
‘국가’나 ‘민주주의’ 같은 관념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사고방식이다. 이는 발전이 일어났던 산업혁명 시기로, 특히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농업과 시골 마을의 생활을 버리고, 도시적인 삶과 공업 분야 일자리를 택했다. 무엇보다도 벌이가 훨씬 좋았다. 산업화는 서양 역사에서 핵심적인 발전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노예 노동과 전 세계 식민지에서 얻은 이익의 공이 크다. 식민지 주민들은 먼저 제조업에 필요한 원자재에 접근하도록 해주는 노동력 구실을, 그다음에는 완성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 구실을 했다. 이윤과 발전을 끝없이 가져다주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식민지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그리고 우리가 뒤늦게야 인정하게 되었지만, 원자재가 다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공장 시스템의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제조업은 단순히 경제를 혁명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제조업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산업화 이전에는 사람들은 노동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가를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관리할 수가 있었다. 일은 계절에 따라 이루어지며, 날씨, 수확물, 일광 시간에 따라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가 있어서, 심지어는 밤 시간도 쪼개어 두 번 잠을 자면서 그사이 몇 시간을 깬 채로 보내고는 했다. 공장을 바탕으로 삼는 제조업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사람들은 말하자면 24시간 내내 일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았다. 혹사당하면서 노동을 하고, 손가락과 팔을 잃고, 이윤을 향한 갈망과 기계에 희생되었던, 이 시스템 속에서 착취를 당한 사람들, 산업 노동자들, 특히 많은 아동 노동자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노동자들은 여기서 또 다른 것도 잃게 되었다. 자신들의 시간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잃은 것이다.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접어들 때까지, 서구 사회는 노동자들과 이들의 노동 시간을 효율과 이윤을 위해서 훨씬 더 쥐어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20년대에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다음에는 산업화된 서양 전역에서 공장 소유주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쥐었던 한 남자의 공이 컸다. 그의 이름은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였다. 역사상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용주들은 그에게 ‘스피디 테일러(Speedy Taylor)’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존 헨리 벨빌과 마찬가지로 시계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는 공장에 나와 노동자들이 일과를 보내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테일러가 사업에 썼던 주된 도구는 스톱워치였다. 그는 사람들이 업무를 이루는 개별적인 요소를 완수하는 데에 들이는 시간을 아주 까다로울 정도로 측정했다. 작업 과정의 그 어떤 물리적인 요소도 그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테일러는 효율성이라는 제단을 숭배했다. 가능한 한 적은 시간을 들여서 업무를 완수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노동을 조사하고 관리하는 영역에서 그가 일군 혁신 덕분에 “과학적 경영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
그리고 테일러의 사상은 그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은유적인 차원에서 모든 경영대학의 기반이 되었다. 여느 수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문제건 간에 해결책은 과학인 것이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주민들을 원자재의 원천이자 새로운 시장으로 취급했던 한편, 테일러의 효율성 패러다임은 모든 곳에 있는 노동자들을 기계처럼 취급했다. 노동자들은 이런 점을 금세 알아챘다. 책이 출간되었던 해, 테일러가 보스턴 중앙 노동조합에서 연설을 하는데, 한 조합원이 그를 따로 불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걸 과학적 경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걸 과학적 몰아가기라고 불러요.” 테일러의 방법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였을지는 모르나, 사람들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혹사시켰다. 노동자들이 이런 식으로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과학적 경영은 서양의 주류적인 사고방식에 스며들었고, 지금도 계속 스며들고 있다.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려는 것이건, 효율성을 거부하려는 것이건, 또는 효율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건 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효율성에 집착한다. 식민화된 지역 전반에서 나타나듯이, 테일러의 사상 속에도 일부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내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결함도 있고 착취를 일삼는 시스템이었으나, 이 시스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부적합한 인간으로 취급되었다. 서양 문명의 역사 속에서 이 사상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 확장되었다.
6장 ‘시간은 돈이다’ 208~213쪽
◎ 차례
들어가는 말
1.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과학
Nullius in verba
2. 아는 것이 힘이다: 교육
Knowledge is power
3. 펜은 칼보다 강하다: 문자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4.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법
Justice is blind
5. 민중에게 권력을: 민주주의
Power to the people
6. 시간은 돈이다: 시간
Time is money
7. 국가는 당신을 원한다: 국민
Your country needs you
8.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Art for art’s sake
9.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죽음
Death is the great equalizer
10.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 공동선
We’re all in this together
나오는 말
감사의 말
참고문헌
◎ 지은이
수바드라 다스(Subhadra Das)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과학사와 철학사를 전공했고, 동 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과학적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팟캐스트, TV, 라디오 등에서 대중과 활발히 접촉하며, 권력이 조작하고 숨긴 역사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첫 책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세계사를 연대, 사건, 인물과 같은 기존의 주제가 아닌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풀어내며 역사 분야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서구 중심주의’라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진부하고 낡은 것이라 간주되던 메시지를 ‘프레임’과 연관시키며,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역사에,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통렬하게 밝혀내어 찬사를 받았다.
◎ 옮긴이
장한라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과 불어불문학을 전공했고, 인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학술대회, 국제 영화제, 북토크, 해외 언론 인터뷰 등 국제 행사 통역과 사회과학 분야 논문 번역을 맡고 있고, 서울대학교 교수진의 영어 코치를 담당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세계의 교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인류 진화의 일곱 걸음』 『예루살렘의 역사』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열두 달 초록의 말들』 『너와 나의 야자 시간』(공저) 『게을러도 괜찮아』(공저)가 있다.
◎ 추천의 말
“우리가 문명화의 증거라 믿는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친다.”
- 댄 힉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대약탈 박물관』 저자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가려져 있던 풍부한 역사가 펼쳐진다.”
- 로마 아그라왈,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저자
제목 |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
저자 | 수바드라 다스 |
출판사 | 북하우스 |
발행일 | 2024. 06. 07. |
페이지 수 | 408쪽 |
사이즈 | 141✕210 |
도서 형태 | 무선 |
ISBN | 979-11-6405-254-7 03900 |
분야 | 역사 | 세계사 |
정가 | 20,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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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심어놓은
권력의 프레임을 뿌리 뽑는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아는 것이 힘이다’, ‘시간은 돈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이러한 말들은 믿어 의심치 않은 지혜로 우리 사회에서 수용되고 있다. ‘과학의 합리성’, ‘교육의 힘’, ‘시간의 중요성’, ‘글의 영향력’ 등을 대표하는 보편적인 신념들은 현대 문명의 성취이자, 우리 사회의 핵심 가치로 공유된다. 하지만 이를 순수하게 옳은 것으로만 생각해도 될까? 오히려 너무 당연하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 안에 깃든 역사적 의미를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현대 문명의 성취이자, 오랜 시간 지켜온 신념으로 공유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이면을 살펴보며, 이 강력한 말들 속에 어떤 ‘권력’의 프레임이 숨겨져 있는지, 역사와 우리의 생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다.
과학, 교육, 민주주의부터 시간, 예술, 죽음까지
열 가지 프레임을 격파하며 세계를 보는 나만의 관점을 되찾는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이성의 최고봉이고, 교육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교양의 중심이며, 시간은 효율적으로 활용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자원, 글은 모든 생각과 사건을 표현할 수 있는 마법의 도구… 이것이 우리의 보편적 생각으로 이를 갖추는 것을 문명화의 기본으로 간주한다. 자연스럽게 이를 갖추지 못한 사회, 사람은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간주한다. 근본적인 질문은 여기서 나온다. 우리 머릿속에 깊이 박힌 ‘과학’, ‘교육’, ‘글’, ‘시간’ 등의 개념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우리가 세운 문명화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누가 확립했으며, 결정적으로 누가 이익을 보고 있는가?
근사하고 당연해 보이는 가치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모양을 갖추고 발전하며,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의 결정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그들이 짜놓은 권력 게임의 중심엔 ‘문명과 야만’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책은 현대 문명을 지탱하는 열 가지 핵심 가치의 생성 과정을 탐구하며, 서구 권력이 어떻게 자신들의 프레임을 활용해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억압과 착취의 역사를 펼쳤는지 파헤친다.
과학을 독차지한 자들은 누구인가? ‘고전’은 누가 결정하며, 어떻게 제국주의의 비전이 되었나? 피라미드는 외계인이 지었다는 말에 숨겨진 뜻은? 시간은 왜 우리를 걷잡을 수 없이 조여오는가? 잉카제국의 문자 ‘키푸’가 역사에서 삭제된 이유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을 던지며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역사에,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밝혀낸다.
지금 우리에겐 다른 세상을 꿈꿀 힘이 있는가?
프레임을 바꾸지 않으면 어떤 역사책을 읽어도 소용이 없다!
대한민국은 일제 식민지 시대로부터 현대사를 시작하여, 해방 이후엔 한국전쟁을 겪고 남북으로 갈라진 채,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서구 문물을 바탕으로 사회 체계가 형성되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선진 문명이란 명목으로 수용된 서구 세계의 사상과 가치관은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고,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건 아쉽지만 부정할 수 없다. 이 책은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 세계의 프레임마저 그대로 내면화하여 우리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질문을 던지며, 이제 프레임에서 완전히 벗어나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 힘을 되찾자고 제안한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건 즐겁기보다는 고난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이 수용해온 신념들을 바닥부터 뒤집어엎고 부정해야 하는 과정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것이 권력의 프레임을 벗어나, 역사를 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한다. 지금, 역사를 읽는 진정한 이유와 새로운 희열이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 책 속으로
서양 문명이 의미를 띠게 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서양 문명과 연관 짓는 관행과 가치들(몇 가지만 언급해 보자면, 민주주의, 정의, 과학의 합리성 등이다)은 점점 커져가는 유럽 제국의 야망과 권력에 발맞춰 나타났다. 어디가, 또 무엇이 문명화되었는가를 결정한 것은 바로 식민지 통치자들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만의 프레임 속에서 문명을 규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순히 더 강력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나머지 지역보다 더욱 발전한 곳들이라 주장한다. (…) 서양 문명이란 여러모로 보건대(앞으로 살펴볼 것처럼, 적어도 열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현실을 누르고 브랜딩이 성공한 사례라는 얘기에 가깝다. ‘서양’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서양 문명은 단순한 결과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문명화라는 사명’은 식민지를 건설한 국가들의 비전이자 변명이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세계의 나머지 지역을 단순히 자기들 것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만든 문명이라는 틀을 이용해 완전히 재구성했다. (…) 나는 단순히 이런 관념 뒤에 자리 잡은 거짓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기보다는 애초에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런 관념들이 사실이라고 제풀에 속아 넘어갔는가를 이해해보려 한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사용하는 말들이 사실은 어떤 의미이고, 또 그런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주장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들어가는 말’ 14~17쪽
프레이저의 저서는 문화적 발전, 진보, 문명에 관한 기존의 사상을 확고하게 굳혔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사상의 초기 버전은 인종이라는 과학적 개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분류학과 지구상의 생명체를 구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외양의 관찰은 지능이나 행동과 같은 보다 추상적인 자질들과 계속해서 밀접하게 연관이 되었다. 19세기 가장 중요한 영국의 민속학자였던 제임스 카울스 프리처드는 유럽인의 하얀 피부, 그리고 더 훌륭한 지능은 그보다 어두운 피부를 지닌 사람들이 아직 겪지 못한 문명화 과정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믿었다. 앙리 드 생-시몽은 문명이 변화할 수 있는가에 관해 이보다 덜 긍정적인 견해를 품고 있었다. 그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유럽 백인과 같이 높은 지능에 이를 수는 없다고 말하며 프랑스가 노예 제도를 다시금 제도화한 행동을 정당화했다. 인류학자 프레더릭 파라도 여기에 동조했다. 파라는 1866년, ‘인종의 적(Aptitude of Races)’이라는 강의에서 전 세계 사람들을 세 집단으로 나누었다. 야만인 집단, 반쯤 문명화된 집단, 문명화된 집단이었다. 그는 자신이 야만인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만회할 수도 없고”, 손을 쓸 도리가 없이, 마치 “살아 있는 화석”처럼 시간 속에 얼어붙은 채로 있다고 설명했다. (…)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는 프레임이 되었고, 그 안에서 우리 인류는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토론 질문을 계속 던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자청하는 문명적인 사람들은 설 자리가 생겼다. (…) 과학, 인종, 문명이 강력하게 결합한 결과, 비서구인들은 단순히 이해하기 힘든,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읽혔을’ 뿐인지도 모르는 때조차도, 과학적으로 봤을 때 뼛속부터 글러먹었다는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인류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한 가지 특정한 방식으로만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 그 자체의 방법을 통해서만 말이다. 비서구 지역 출신인 사람들, 특히 인종적으로 백인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들도 인간이라고 얘기한다면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리 없다. 그 사람들을 믿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책임이 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인종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며, 그 연장선상에서 인종차별주의자들과 논쟁을 벌이는 일도 사실상 무의미하다.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인종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게끔 만들 것이며, 과학이 이들의 알리바이다. 과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안전한 거리를 확보하게 해준다.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라는 말은 당연한 말처럼 보이지만 더 광범위한 역사적 맥락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면 과학의 기반, 특히 인종 과학의 기반이 더욱 깊은 목적에 복무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백인이라는 것, 그리고 문명화되었다는 것은 동시에 강력해진다는 뜻이 된다.
1장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45~48쪽
영국에서 ‘고전’이 부유한 젊은이들이 고대 작가들을 연구한다는 의미로 자리를 잡은 것은 1684년 무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칭 “해턴 가든에서 교육을 받은 몇몇 젊은이들”이라는 집단이 로마의 건국 역사를 쓴 4세기의 공직자 에우트로피오의 작품을 자체적으로 번역해서 출판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1666년 런던 대화재의 잿더미 속에서 런던이 마치 제국의 정신을 품은 불사조처럼 부상하고 있던 때였으며, 프랜시스 베이컨의 표현처럼, ‘아는 것이 곧 힘’이라는 인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해턴 가든의 선생님이었던 루이스 메이드웰은 이 책의 서문에서 영국인들이 교육에 조금 더 진지해진다면, “영국의 잠자고 있는 재능이 스스로 눈을 뜰 것”이라고 썼다. 교육은 단순히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교육은 대영제국의 지평을 넓히고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 데에도 핵심 역할을 할 도구였다. (…)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무렵, 몇몇 문서가 연달아 유출되며 영국 교육 시스템에 포함되어 있는 저열한 모방품을 폭로했다. 이 가운데 하나는 ‘헤링게이 종합 중등 학교’(1969년)라는 보고서로, 저자의 이름을 따서 일반적으로는 덜튼 보고서라고 부른다. 이 보고서는 북부 런던의 흑인 지역 공동체에 실망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서인도 제도 출신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학교는 교육 수준을 낮춰야 한다고 밝혔던 것이다. 이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백인 영국 학생들보다 IQ가 훨씬 낮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후속 보고서인 ‘통합 교육 관련 교육 위원회 보고서’는 헤링게이 의회가 학생들의 학습 능력에 따라 자치구 내의 학교들을 구분할 것을 권고했다. (…)
이 시점은 프랜시스 골턴이 세상을 뜬 지 48년 뒤이긴 하지만, 이런 조치를 그가 찬성했을 것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우생학적 원칙을 바탕으로 운영하는 국가라는 골턴의 비전에서는 지능을 수치화하는 것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그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자손을 낳는 것은 지원하고 장려해야 하는 반면, 지능이 제일 떨어지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찰스 스피어만이나 시릴 버트 같은 심리학자들은 지능을 표준화한다는 생각을 품고, 표준화된 지능 시험을 설계하고 개발하면서 골턴의 비전을 현실로 만들었다. 현재 우리가 지능의 유전학이라고 생각하는, 지능이 유전되는 것인가에 관한 버트의 연구는 11+ 시험을 도입시켜 영국의 정규 교육 시스템의 근본을 형성했다. 11+는 인생을 결정짓는 시험이었다. 높은 점수를 받아 지능이 높다고 여겨지면, 명문 그래머 스쿨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문법(grammar)이란 당연히 라틴어였으며, 그래머 스쿨에서 교육을 받는 일은 그 뒤로도 학업적인 성공을 거둘 것이라 상당히 호언장담할 수 있는 길이었다.
2장 ‘아는 것이 힘이다’ 67~81쪽
‘잉카 패러독스’는 잉카가 그 어떤 것들을 기록하는 체계 없이도 건축, 공학 기술, 관료제와 같이 복잡한 필수 조건들을 모두 거느리고 문명을 건설했다는, 이해하기 힘든 인류학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사실이라기에는 너무 이상한 소리처럼 들린다면, 그 이유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잉카에는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알고 있는 문자, 그러니까 종이에 쓰인 흔적은 없었지만, 매듭을 지은 실을 사용하는 ‘키푸(khipu)’라는 고유한 기록 시스템이 있었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러니까 누군가 굳이 키푸에 관해 생각해보기 전까지는, 키푸는 일반적으로 수를 세거나 계산할 때 쓰는 기초적인 시스템이라 여겨졌다.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설형문자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지만 최근 10년 동안 이뤄진 연구들은 잉카의 키푸가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 세계 여느 문자만큼이나 복합적인 기록 시스템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
스페인 정복자들도 키푸에 관해 알고 있었다. 잉카 출신 어머니와 스페인 정복자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초기의 ‘제3문화 아이’였던 잉카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는 잉카인들이 “셀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매듭으로 기록했다. 심지어는 전투와 싸움, 잉카를 방문한 모든 대사들, 그리고 그들이 남긴 모든 연설과 언쟁까지도 말이다”라고 1609년에 적었다. 키푸 묶음을 읽는 사람은 키푸카마유크(khipukamayuq), 또는 ‘매듭 지킴이’들이었다. 이들은 무척 정확하고도 접근하기 좋게끔 기록을 보관해두고 있어서, 정복에 나선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을 확실히 위협적인 존재라 여겼다. 그보다 25년쯤 전인 1583년,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에 있는 키푸는 우상숭배적인 물건이므로 모두 태워버려야 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일에 관한 스페인의 설명과 상반된 기록들을 손쉽게 없애는 방법이었다. 1562년 스페인의 정복자 디에고 데 란다가 책 27권을 비롯해 마야의 주술적인 물건들 수백 개를 태우라고 명령했을 때와 똑같은 수법이었다. 잉카제국을 격파한 것은 스페인의 총과 철만이 아니었다. 스페인의 이야기들도 가세했다. 잉카는 자신들의 역사를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남길 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생각했던 종류의 것이 아니었고, 스페인이 모두 제거했을 뿐이다. (…)
설령 고고학이나 인류학에는 한 번도 관심을 품어본 적이 없더라도, 이집트에 있는 대피라미드를 지은 것이 외계인이라는 얘기는 아마 들어봤을 것이다. 외계인이라느니, 아틀란티스라느니, 지구의 속이 텅 비어 있다느니 같은 얘기들을 대개는 피해망상증의 경계에 서 있는, 망상에 빠진 사람들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지껄이는 소리라며 일축하기가 쉽다. 그렇지만 사실 이 사람들은 정보가 없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잘못된 정보일 수는 있지만, 정보가 차고 넘치는 것만은 확실하다). 또, 이런 생각들은 어느 정도는 실제 고고학과 인류학 이론의 논리적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J. G. 프레이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 휴 블레어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문명화되지 않은 백인이 아닌 비서구인들은 이들이 생활공간으로 삼았던 도시나 기념물을 지을 만한 지적 능력이나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유럽 학자들은 그레이트 짐바브웨(잠베지강과 림포포강 사이에 있는 14세기 요새 도시이며, 한때 약 18,000명이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가 예루살렘에 있는 시바 여왕의 궁전을 모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그렇게 복잡한 건축물과 공학 기술을 다룰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독일 탐험가 카를 마호는 1871년 그레이트 짐바브웨를 방문했을 때 이 유적지는 이 지역 사람들이 아니라 1,500년이나 앞서 살았으며 8,000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던 성서 시대 사람들이 지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그곳에는 한때 문명화된 국가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 문명은 아프리카 지역의 문명일 리 없었다. 이와 같은 시각은 인종차별주의를 함축하고 있으며, 과거의 서구 문명에 대해서는 이런 주장을 결코 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튀르키예에 있는 에페수스 신전이나, 아테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이나,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을 외계인이 지었다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인종차별주의라는 동전 한 개의 반대편을 보면, 이와 같은 초기 문명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 분명히 ‘어딘가에는’ 백인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사라진 고대의 백인을 찾아 일생을 바친 연구자들이 있다.
3장 ‘펜은 칼보다 강하다’ 111~117쪽
‘국가’나 ‘민주주의’ 같은 관념과 마찬가지로, 시간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기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사고방식이다. 이는 발전이 일어났던 산업혁명 시기로, 특히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농업과 시골 마을의 생활을 버리고, 도시적인 삶과 공업 분야 일자리를 택했다. 무엇보다도 벌이가 훨씬 좋았다. 산업화는 서양 역사에서 핵심적인 발전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노예 노동과 전 세계 식민지에서 얻은 이익의 공이 크다. 식민지 주민들은 먼저 제조업에 필요한 원자재에 접근하도록 해주는 노동력 구실을, 그다음에는 완성품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 구실을 했다. 이윤과 발전을 끝없이 가져다주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식민지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그리고 우리가 뒤늦게야 인정하게 되었지만, 원자재가 다 떨어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공장 시스템의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제조업은 단순히 경제를 혁명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제조업은 사람들이 일하는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었다. 산업화 이전에는 사람들은 노동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여가를 어느 정도 융통성 있게 관리할 수가 있었다. 일은 계절에 따라 이루어지며, 날씨, 수확물, 일광 시간에 따라 좌우되었다.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쓸 수가 있어서, 심지어는 밤 시간도 쪼개어 두 번 잠을 자면서 그사이 몇 시간을 깬 채로 보내고는 했다. 공장을 바탕으로 삼는 제조업 시스템이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사람들은 말하자면 24시간 내내 일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았다. 혹사당하면서 노동을 하고, 손가락과 팔을 잃고, 이윤을 향한 갈망과 기계에 희생되었던, 이 시스템 속에서 착취를 당한 사람들, 산업 노동자들, 특히 많은 아동 노동자들의 역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노동자들은 여기서 또 다른 것도 잃게 되었다. 자신들의 시간을,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자신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잃은 것이다.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접어들 때까지, 서구 사회는 노동자들과 이들의 노동 시간을 효율과 이윤을 위해서 훨씬 더 쥐어짰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1920년대에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다음에는 산업화된 서양 전역에서 공장 소유주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거머쥐었던 한 남자의 공이 컸다. 그의 이름은 프레더릭 윈즐로 테일러였다. 역사상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고용주들은 그에게 ‘스피디 테일러(Speedy Taylor)’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는 존 헨리 벨빌과 마찬가지로 시계의 도움을 받아서 새로운 직업을 스스로 만들어냈다. 그는 공장에 나와 노동자들이 일과를 보내는 모습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테일러가 사업에 썼던 주된 도구는 스톱워치였다. 그는 사람들이 업무를 이루는 개별적인 요소를 완수하는 데에 들이는 시간을 아주 까다로울 정도로 측정했다. 작업 과정의 그 어떤 물리적인 요소도 그의 눈을 벗어날 수 없었다. 테일러는 효율성이라는 제단을 숭배했다. 가능한 한 적은 시간을 들여서 업무를 완수하는 최고의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노동을 조사하고 관리하는 영역에서 그가 일군 혁신 덕분에 “과학적 경영의 아버지”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
그리고 테일러의 사상은 그 당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은유적인 차원에서 모든 경영대학의 기반이 되었다. 여느 수많은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어떤 문제건 간에 해결책은 과학인 것이다. 제국주의는 식민지 주민들을 원자재의 원천이자 새로운 시장으로 취급했던 한편, 테일러의 효율성 패러다임은 모든 곳에 있는 노동자들을 기계처럼 취급했다. 노동자들은 이런 점을 금세 알아챘다. 책이 출간되었던 해, 테일러가 보스턴 중앙 노동조합에서 연설을 하는데, 한 조합원이 그를 따로 불러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그걸 과학적 경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저는 그걸 과학적 몰아가기라고 불러요.” 테일러의 방법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였을지는 모르나, 사람들을 만신창이가 되도록 혹사시켰다. 노동자들이 이런 식으로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나서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무렵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과학적 경영은 서양의 주류적인 사고방식에 스며들었고, 지금도 계속 스며들고 있다. 더 높은 효율성을 추구하려는 것이건, 효율성을 거부하려는 것이건, 또는 효율성에서 벗어나려는 것이건 간에, 우리는 끊임없이 효율성에 집착한다. 식민화된 지역 전반에서 나타나듯이, 테일러의 사상 속에도 일부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들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이 내재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결함도 있고 착취를 일삼는 시스템이었으나, 이 시스템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예 부적합한 인간으로 취급되었다. 서양 문명의 역사 속에서 이 사상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 확장되었다.
6장 ‘시간은 돈이다’ 208~213쪽
◎ 차례
들어가는 말
1. 누구의 말도 그대로 믿지 말라: 과학
Nullius in verba
2. 아는 것이 힘이다: 교육
Knowledge is power
3. 펜은 칼보다 강하다: 문자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4.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다: 법
Justice is blind
5. 민중에게 권력을: 민주주의
Power to the people
6. 시간은 돈이다: 시간
Time is money
7. 국가는 당신을 원한다: 국민
Your country needs you
8.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
Art for art’s sake
9.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죽음
Death is the great equalizer
10. 우리는 한배를 타고 있다: 공동선
We’re all in this together
나오는 말
감사의 말
참고문헌
◎ 지은이
수바드라 다스(Subhadra Das)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서 과학사와 철학사를 전공했고, 동 대학교 박물관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과학적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연구한다. 팟캐스트, TV, 라디오 등에서 대중과 활발히 접촉하며, 권력이 조작하고 숨긴 역사를 알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첫 책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은 세계사를 연대, 사건, 인물과 같은 기존의 주제가 아닌 개념과 생각을 중심으로 풀어내며 역사 분야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서구 중심주의’라는 그 역사적 중요성에 비해 진부하고 낡은 것이라 간주되던 메시지를 ‘프레임’과 연관시키며, 서구 세계가 만든 거대한 억압과 착취의 구조가 역사에, 그리고 우리 머릿속에 얼마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 통렬하게 밝혀내어 찬사를 받았다.
◎ 옮긴이
장한라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과 불어불문학을 전공했고, 인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학술대회, 국제 영화제, 북토크, 해외 언론 인터뷰 등 국제 행사 통역과 사회과학 분야 논문 번역을 맡고 있고, 서울대학교 교수진의 영어 코치를 담당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세계의 교사』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인류 진화의 일곱 걸음』 『예루살렘의 역사』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열두 달 초록의 말들』 『너와 나의 야자 시간』(공저) 『게을러도 괜찮아』(공저)가 있다.
◎ 추천의 말
“우리가 문명화의 증거라 믿는 것들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친다.”
- 댄 힉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대약탈 박물관』 저자
“역사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가려져 있던 풍부한 역사가 펼쳐진다.”
- 로마 아그라왈, 『빌트, 우리가 지어 올린 모든 것들의 과학』 저자